투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 출생한 오스트리아 철학자이며 논리 실증주의와 일상 언어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는 논리학과 수학, 철학, 심리철학, 언어 철학 분야에 업적을 남겼으며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굉장한 부호였고 비트겐슈타인은 8남매 가운데 막내로 자랐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제철업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어머니는 레오폴디네 칼무스로 유대인 아버지와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노벨상을 받은 프리드리히 하에에크의 이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예술가와 자식인을 존중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며 음악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집에는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와 같은 예술가들이 늘 방문했으며 요하네스 브람스가 그의 두살위의 누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정도로 가까운 사이 였다고 합니다. 그의 형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는데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었지만 러시아 포로수용소에서 왼손만으로 피아노를 연습하며 명성을 유지한 인물입니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음악에 열정이 많았으며 그의 생활과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가족도 자살 경향이 있었습니다. 장남인 한스 비트겐슈타인은 4살때 작곡을 할정도로 신동이었지만 1902년 쿠바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뒤이어 삼남 루돌프가 베를린에서 자살하였고 차남 쿠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시기 오스트리아군이 퇴각을 결정하자 지휘하던 진중에서 총으로 자살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역시 청년 시절 줄곧 자살 충동에 시달렸으며 러셀로부터 천재로 인정받은 후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아다고 합니다. 그는 1903년 까지 가정교육을 받은후 린츠에 있는 린츠 국립실업고등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 보다 6개월 생일이 빨랐던 아돌프 히틀러가 1년간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는 서로 알고 지냈는지 확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일면식이 없는 사이였다고 추측됩니다. 학교생활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약간 말더듬이 있었고 우아한 옷을 즐겨입었다고 합니다. 그는 1906년 베틀린에서 기계공학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다빈치, 파우스트 베란치오와 같은 사람들이 남긴 르네상스 시기에 흥미를 느겼으며 이후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항공과 관련한 논문으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공학 연구소의 연구생으로 등록되어 대기원 상층을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맨체스터에서 연구 생활하는 동안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공저한 수학원리와 고틀로프 프레게의 산수의 근본법칙을 읽고 수학기초론에 흥미를 느꼈다고 합니다. 이후 게임브리지 대학 시절 버트런드 러셀 강의실에 출석하러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 토론에 대한 깊은 감명을 받았고 조지 에드워드 무어를 알게 되어 수리 논리학의 원리를 대상으로 한 작업을 시작하였스빈다. 이시기 러셀은 수학기초론과 철학을 확장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후계자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시기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 의해 자신이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로만 비추어지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그는 유산을 상속받아 유럽의 부호 가운데 한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상속받은 유산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의 예술가와 작가들을 돕기위해 기부했습니다. 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육군에 자원하빈다. 입대초기에는 함선에서 근무하였지만 이후 포병대로 전근하였습니다. 또한 최전방 조종사로 참전하였고 용감한 행동과 침착하고 냉정한 영웅다운 활약을 일삼았습니다. 또한 다양한 임무수행을 통해 은장무공훈장을 여러개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후 윤리와 종교에 딸린 기호를 가지고 ‘논리’에 부합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논리분석을 윤리개념에 접합하면서 그림이론을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에 복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트리니티 칼리지에 부임했으며 결혼을 고려하였지만 파혼후 독신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당시 비트겐슈타인은 양성애자 였다고 알려집니다. 1947년 비트겐슈타인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집필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는 영구의 더블린의 관광명소에서 머물렀으며 그대 암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51년 초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유언장을 작성하게 됩니다. “내 마음은 이미 죽었어, 더이상은 고통일 뿐이지, 내 알기로 삶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고 그 다음엔 정신적인 삶만이 남게 되는거야” 라고 유언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라는 말을 덧붙였고 1951년 4월 29일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논리 철학 논고>라는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를 만들었습니다. 이 철학책은 지금까지도 많은 철학자들이 정의하려고 했던 무수한 철학논리를 한번에 포괄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무서움과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일부로 전장에서도 위험한 지역에만 배치되기를 바랄정도였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그는 비범한 삶을 산 철학자입니다. 또한 예술가 이기도 하며 모험가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유명인들의 삶을 들려다 보면 평평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위대한 업적에 가려져 그들의 인간적이 부분까지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많은 명언과 철학 논리는 앞으로도 계속회자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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