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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파동 모형

by 채리의 행복한 세상 2021. 3. 22.

빛의 파동 모형

 

빛 입자의 호름으로 정의한 뉴턴의 빛에 대한 개념은 경쟁 관계에 있 던 빛의 파동 모형을 18세기 말까지 압도했습니다.. 실제로 입자 모형이 파동 모 형보다 낫다는 증거일뿐 아니라 과학의 현자로서 뉴턴이라는 인물이 발휘하는 영향력 때문에 입자 모형은 우위롭 차지했다, 그러나 그후 백여 년에 걸쳐 빛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이우어지면서 먼저 뉴턴의 견해에 오 류가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 드러났고. 그 다옵으로 20세기 초에는 그의 운 동법칙조차 기계학에서 최종적인 법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실 재 뉴턴의 영향력은 앞에서 이야기했던 호이헨스의 연구 외에도 여러 측면 에서의 발전을 막았다. 사실 18세기 말까지 빛의 파동성을 입중할 만한 관 축중거들이 많았기 때문에 좀더 열정적으로 연구들 진행했더라면 2()여 년 온 더 빨리 빛의 파동 모형을 만듄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당시에는 널리 인정받지 못했지만 뉴턴이 등정하기 전부터 빛의 파동성을 중명하는 중거가 있었다. 그런 연구를 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프란체스코 그리말디였다, 그는 볼로냐의 예수회 대학 에 수학 교수로 있으면서. 뉴턴이 나중에 그랬던 것처럼. 한 줍기 태양 빛 올 어두운 방의 조그만 구멍으로 통과시키며 빛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는 광선이 두 번째 작은 구멍을 통과해 스크린에 도달할 때 그 가장자리에 색 깔이 있고. 그 크기도 구멍의 크기보다 약간 큰 것을 발견했다. 만약 빛이 구멍옹 동과해 직선으로 진행했다면 그런 현상온 나타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빛이 구멍을 몽과하면서 약간 밖으로 휘었다는 (윤바론) 결론을 내렸 고. 그 현상을 회절이라 불렀다. 그는 또한 작은 물체(칼날과 같 은)릅 빛 속에 놓으면 묻체의 가장자리에서 빛이 회절되어 그림자로 흘러 둘어갑에 따라 그 뭄새가 드리우는 그립자는 가장자리 부분에 색을 띠게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빛이 파동으로 이동한다는 직접적인 중거이 며. 바다나 호수 위의 파도가 장애물이나 장애뭄의 몸윤 지나갈 때 동일한 종류의 효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빛의 경우에는 파징이 매우 작기 때문에 그 효과가 미미하며 아주 세밀히 측정해야만 감지된다. 그리말디의 연구는 그가 사망하고 2년이 지나서야 바로소{빛 색깔 무지 개에 관한 물리학과 수학).J라는 책 으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미 사망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널리 암리거나 방어할 수 없었고. 당시 그 책을 알게 된 및 안 되는 사람듄도 그 연구 건과 룰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정교한 실험을 할 수 없었을(또는 하려고 하지 않았 운) 것이다. 그 책올 읽은 독자 중 그 중요성을 간파한 사람은 그리말디가 사망했읍 당시 21세였던 뉴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뉴턴은 관측된 현 상이 반사나 굴절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이 지닌 위력옵 알이채지 못 했던 것 같다. 뉴턴이 그리말디의 책을 읽고 파동 모형으로 생각을 바꿨다 면 과학이 어떻게 발전되었을까하고추측해보는것은. 솔깃한이야기이긴 하지만 결국 부질없는 일이다. 18세기 내내 빛의 입자 모형이 사람둘의 생각을 지배하긴 했지만. 1727년 에 뉴턴이 사망한 뒤 다른 대안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인뭄이 앞에서도 언급되었단 스위스의 수학자 래온하르 트 오일러이다. 순수수학에서 남긴 업적으로 흔히 기억되는 오일러는 최소 작용의 원리(사실. 이 원리가 말하는 것은 자연이 게으르다는 것으로. 이윤 잘 보여주는 에가 빛은 가장 짧은 길인 직선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이다)에 대한 생 각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조제프 라그랑주(1736~1813)에게 연구 방향을 재시했고, 라그랑주의 연구는 다시 20세기 양자론에 수학적 기 초문 재공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오일러는 같은 수학 기호듄윤 처 음으로 도입했으며. 태양을 직접 쳐다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준 전 형적인 예가 되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수학 교수로 있던 1733년. 그는 이 어리석은 짓 때문에 오른쪽 눈의 시력윤 잃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1760년대에는 백내장으로 왼쪽 눈도 안 보이게 되었지만 그런 장애도 비법 한 수학적 연구 성과듭 만둘어내는 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일러는 베물린의 프리드리히 대제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던(그 는 나중에 예카테리나 여제의 부음을 받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그곳 에서 생운 마갑했다) 1746년에 빛의 모형에 대한 연구롭 출판했다. 파동 모 형옵 입중하는 중거몹 분명히 설명했옵 뿐 아니라. 회절 등 입자 모형으로 는 설명하기 힘든 여러 현상듄옵 면밀히 열거했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에는 위력이 있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빛의 파동과 소리의 파동 간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1760년대에 쓴 편지에서는 “태양 광선과 에테르 의 관계는 소리와 공기의 관계와 같다“고 했으며. 태양을 “빛을 울리는 벵을건 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이 비유는 실감나기는 하지만 불완전하며. 파동 모형이 앞으로 얼마나 머나먼 길옵 나아가야 할지몹 보여준다. 사실, 19세기에 실 험 기술이 발달하여 의심을 거둘 수 있게 해줄 때까지 물리학계에서 빛의 성질에 관한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전환에 최초로 중요한 지국을 줄 인뭄이 오일러가 사망했던 1773년에 벌써 열 살이 되어 있었다. 토머스 영은 1773년 6월 13일 서머싯의 밀버턴에서 태어 났다. 그는 신동으로 두 살 때 영어몰 읽었고. 여섯 살 때에는 라틴어를, 그 다음에는 그리스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히브리어. 칼데아어. 시리아어. 사마리아어. 아랍어. 패르시아어. 터키어. 에티오피아어문 할 쥰 알았다. 이 모든 게 열여섯 살 때까지 해낸 일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그는 은행가의 아둘이었다) 영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거의 다 할 수 있었고. 10대 시절까지 정식 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다. 스스로 폭넓게 공부했던 그에게 는 분명히 그런 것은 팔요없었다. 그는 일씩부터 중동의 고대사와 고고학 에 관십옵 보였고(그가 배운 언어둘이 암시하듯). 문리학 화학 그리고 그밖 에 많온 것들을 배우는 데에도 관심이 있었다. 출중한 의과의사였던 종조 부리처드 브록클리스비( 1722-97)의 영향을 받은 영은 런던에서 개업하고 있던 종조부와 함께 일하기 위해(그리고 장차 그 일옵 물려받윤 생각으로) 19세의 니이에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런던. 에든버러. 괴팅겐에서 공부풀 했다, 1796년, 괴링겐 에서 의학박사 학위릅 받은 그는 서너 달 동안 독일을 여행하고 얼마 동안 온 캐임브리지에서 지냈다(종조부가 사망한 지 얼마 안 지난 때였다). 의대 1 학년 때 눈이 초점을 맞추는 기작(근육이 수정체의 형태름 바꾸는 방식)에 대 해 설명했고. 그 덕분에 21세의 나이에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던 그 는 이미 과학계의 유명인사였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 이미누엘 칼리지에서 2 년을 보내면서 다재디능한 능력 덕분에 비범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미노미 단 영이라는 변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영은 27세가 되자 리처드 브록클리스비로부터 런던의 집과 재산을 물려받고 의사 일을 시작했다.1811년 성 조지 병원의 외과 의사가 되어 죽을 때(1829년 5월 10 일)까지 평생 의사로 지냈지만. 영은 계속해서 과학 분아에 광법위하고 중 요한 공헌옵 했다 그런 그에게 한번의 예외는 있었다. 그는 1801년부터 1803년까지 영국 왕립연구소에서 강의을 했는대 대부분의 청중들이 이해 하기 어려운 내용이어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영은 난시가 각막의 굴곡면이 고르지 않아 생기는 것이라고 정확하개 선 명했으며. 색윤 인식하는 것은 눈의 서로 다론 수용체에 영향을 주는 빛의 삼원색(빨강 녹색 파랑)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따라서 색명은 한 가 지 이상의 이러한 수용체가 재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것으로 선명)을 최초로 안아냈고. 분지둠의 크기륜 측정했으며(앞장에서 살펴본 것처럽). 왕 립학회의 대외 담당 간사직을 맡았고. 로제타 석 비문이 새겨 져 있는 고대 이집트의 둘-옮긴이)을 해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연구 결과 믈 ,819년에 익명으로 출판하는 바람에 그의 공로가 즉각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윤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빛의 파동성윤 증명 한빛에관한실험으로서.영은이실험으로후대에 길이 기억되고있다. 케임브리지에서 지내던 1790년대 말. 영은 빛의 간섭 현상에 대한 실험 율 시작했다. 1800년. 그는 『소리와 빛에 관한 실험과 연구 개요J에서 뉴턴과 호이헨 스의 두 경쟁의 모형을 비교 · 대조하고. 빛의 서로 다론 색깔은 서로 다론 파장을 가진다고 말하면서 호이헨스의 파동 모형을 지지하기에 ’이르렀 다' 1801년. 영은 이 논쟁에 결정타가 될 생각을 발표했는대 그것은 바로 빛의 파동에서 일어나는 간섭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호수의 파도가 서 로 간섭했을 때(예룝 둘어 두 개의 돕멩이롭 고요한 호수에 동시에 그러나 서 로 디온 방향으로 던졌윤 때)와 똑같이 복잡한 물정 형태풀 만들어낸다. 영 은 먼저 뉴턴의 고리와 같이 뉴턴이 관측한 현상둘이 어떻개 간섭으로 설 명됩 수 있는가들 설명하고. 뉴턴의 실험 자료를 사용하여 빨간빛의 파장 온 6.5x10-미터(현대 단위로)이고 보랏빛은 4.4x10-미터라고 계산해냈 다. 이러한 수치는 현대의 측정값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어서 뉴턴이 얼마 나 훔륭한 실험가이며. 영이 얼마나 훌륭한 이론가인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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