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과 바흐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룬 작곡가로 알려진 모차르트는 지금까지도 ‘음악의 신동’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어려서 부터 남다른 음악적인 재능을 보유했다고 전해집니다. 클래식 음악에 조회가 없는 사람들 또한 모차르트라는 이름은 알고 있으며 그가 남긴 음악을 재생하기만 해도 들어본 음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작곡능력을 가졌지만 35세에 사망한 비극의 인물이기도 한데요.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출생합니다. 출생직후 가톨릭 성당에서 세례명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는데요.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모차르트의 누나였던 나네를을 어려서 부터 가르쳤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3살때 부터 누나를 보고 스스로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터득하였다고 전해지는데요.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재주를 미리 알아보고 직접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고 전해집니다. 나네를 기록에 따르면 어린 모차르트는 4살때 여러곡을 배웠으며 다섯살때 이미 작곡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린 모차르트의 작곡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그를 시험하기도 했지만 모차르트는 그 사람들에게 뛰어난 작곡 실력과 재능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결국 모차르트의 재능을 인정했다고 알려집니다. 아버지의 음악 교육에 대한 열정을 정말 대단했다고 합니다. 특히 모차르트가 6세가 되던해 뮌헨에 데려가 유럽각지로 연주 여행을 보내 여러 작곡가들과 교류하고 배우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1763년 부터 1766년 까지 독일과 여러도시는 물론, 파리, 런던 등을 돌아다니며 많은 작곡가들과 교류하였으며 1764년에는 영국 런던에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작곡을 배우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후 모차르트는 수차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음악을 공부하였으며 마르티니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후 어릴 때 부터 여러 대도시와 궁정에서 연주를 선보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궁정음악가로 화롱하였지만 자유분방한 성격때문에 궁정과 여러가지 갈등을 겪었고 결국 대주교와의 불화로 1781년 잘츠부르크를 떠나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콘스탄체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져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82년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활하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만났다고 전해지는데요.
그는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자신을 찾아온 베토벤을 반갑게 맞이하였으며 당시 베토벤의 나이는 14세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곡을 베토벤이 소화해내자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베토벤을 가르치는데 전념하기도 했지만 베토벤은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자 마자 모차르트에게 작별인사를 전하고 갑작스럽게 빈을 떠났다고 합니다. 1784년에는 빈에 들른 하이든을 만났는데 두거장은 서로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24살의 나이차이를 딛고 금세 친구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아들은 명성으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입니다. 라는 찬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으며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대로 하이든의 영향과 앞서 언급한 대위법적인 전개수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6곡의 하이든 4중주를 3년에 걸쳐 작곡하여 차례로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습니다. 한편 모차르트는 1784년 12월 프리메이슨 자선지회에 가입하였는데 이 프리메이슨도 모차르트 음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는 프리메이슨 가입을 통해 다수의 친구를 얻었으며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프로메이슨의 의식을 위한 음악이나 프리메이슨 사상을 반영한 음악도 몇곡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을 중요하게 여겼던 이유는 바로 돈이 었으며 프리메이슨의 인맥은 모차르트의 일종의 돈줄 역할을 했다고 알려집니다. 모차르트의 빈에서의 활동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습니다. 작곡료나 연주료도 충분하게 받았고 유력가 자제들을 대상으로 피아노 과외를 하면서 충분한 수업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도박과 사치를 즐겼기 때문에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항상 돈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와 더불어 아내도 돈을 잘 관리하지 못하여 매우 비싼 집에서 하녀와 요리사, 미용사를 고용하는 사치를 누렸다고 합니다. 모차르트가 쓴 오패라는 빈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프라하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독일 지역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이 성공하자 모차르트는 다른 작품의 작곡을 착수했습니다. 1788년 모차르트 부부는 빈 중심가의 임대주택을 떠나 빈 교외 알체그룬트에 있는 큰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1789년 돈벌이를 위해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만하임을 비롯하여 독일지역의 여러 도시로 연주 여행을 다녔으며 헝가리나 네덜란드로 부터 후원을 약속받고 그들에게 곡을 써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그의 몸은 쇄약해져 갔으며 아픈 몸을 돌볼 새도 없이 오페라 초연을 해야 했습니다. 마술피리는 성공적이었지만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쉬지 못하고 진혼곡의 작곡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 진혼곡은 당시 젊은 귀족이었던 프란츠 폰 발제그 백작이 거액을 주고 20살에 죽은 아내를 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을 의뢰한 것이었는데요. 모차르트는 작곡료의 절반을 미리 당겨받았기 때문에 부담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11월 20일 고열과 부종에 시달리다가 쓰러졌고 아내와 처제가 간호하였지만 1791년 12월 5일 진혼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이어 그의 부인은 진혼곡을 완성하여 계약금 절반을 받기 위해 작곡가들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이는 모차르트의 또 다른 제자였던 프란츠 쥐스마이어를 통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수많은 저작물들은 지금까지 세상을 빛내고 있습니다. 그의 작업 열정은 누구보다 뛰어났으며 작품의 완성도 역시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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