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클래식 음악가 중에서는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클래식 음악을 작곡했던 대단한 음악가 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곡의 왕’이라고 불리는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는 음악의 최고봉 중 한사람으로 관연악곡, 교회음악, 실내악, 피아노곡등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는 ‘송어’라는 곡이 있으며 겨울 나그네, 백조의 노래, 마왕 등이 있는데요. 교향곡 제8번은 미완성이지만 지금까지 회자되는 가치 있는 명곡으로도 평가되고 있습니다. 슈베르트는 1779년 1월 31일 오스트리아 빈의 교외 리히덴탈에서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와 요리사였던 어미니 사이에서 4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음악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어릴적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슈베르트에게 5살때 부터 악기 교육을 시켰으며 1년 뒤 그의 아버지의 학교에 입학한 슈베르트는 공식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슈베리트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가르쳐주었으며 그의 형 역시 슈베르트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켰습니다. 슈베르트는 7살이 되던 해에 지역 교회의 합창단장인 미하엘 홀처로부터 악기 교습을 받았으며 가족 현악 4중주에서 아버지는 첼로를 슈베리트는 비올라를 맡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슈베르트는 어려서 부터 음악에 대한 재증이 상당히 뛰어났지만 아버지가 슈베르트를 음악가로 키우기 위해서 가르친 것은 아니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슈베르트가 교사가 되길 바랐으며 진로문제로 인해 아버지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고 알려집니다. 1804년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1808년 궁정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모차르트의 서곡이나 교향곡을 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에 군복무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슈베르트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교사근무로 대체복무제를 허용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14년 부터 아버지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했다고 합니다. 이때 부터 그는 작곡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해에 바장조 미사곡을 작곡하였습니다. 1815년 18세에 그의 재능을 일찍부터 아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수백곡의 가곡을 썼으며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마왕’ 등의 명작도 이때 작곡되었습니다.
그가 지은 곡 중 일부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악보로 편집되기도 했습니다. 1816년 슈파운의 소개로 시인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권유로 친구집에 머물며 작곡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이때 부터 그의 방랑생활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후 1818년에는 ‘죽음과 소녀, 송어’를 작곡했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 집안의 두딸의 가정교사가 되어 한여름을 첼리즈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포글과 함께 북오스트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떠났으며 그의 음악이 포글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 연주되어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슈베르트의 명성이 차츰 높아지고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모임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1823년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처녀’를 작곡했으며 가곡 ‘방랑자’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피아노용으로 작곡한 ‘방랑자 환상곡’을 내놓았습니다. 1827년에는 슈베르트가 경제적인 어려움과 인정받지 못하는 불우함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겨울 나그네’를 작곡했습니다. 그해에 그가 평소 존경하던 베토벤이 죽기 1주일 전 짧은 만남을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자신이 작곡한 곡을 베토벤에게 소개했는데 베토벤은 그의 음악적인 역량에 크게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만남 이후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자 슈베르트는 크게 슬퍼했고 베토벤의 관을 운구했던 음악가들 중 한명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베토벤이 떠난뒤 1년후 1828년 그는 자신이 대위법이 부족했던 것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음악 공부를 하려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고 병안에 들게 ㅗ딥니다.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기억력이 감퇴하여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고 하는데요. 허깨비가 보이고 혼잣말을 하는 등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1월 19일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맙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그의 유해를 교회에 묻으려고 했지만 당시 그를 돌보았던 둘째 형 이그나츠가 베토벤 무덤 옆에 묻어주자고 제안하여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슈베르트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던 음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슈베르트 연구가들은 슈베르트가 당시 악보 출판 수입으로 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는데요. 이 액수는 공무원 10년 이상 근무자 연봉에 해당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슈베르트는 생전에 돈을 벌어도 다른 가난한 예술가나 후배, 또는 친구들과 아낌없이 식사를 하는데 나누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친구였던 성공한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는 회고록에서 슈베르트가 얼마나 가난했었는지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이름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세상에 남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업적은 영원히 지구상에 남을 수 있는데요. 하지만 생전에 성공하지 못하고 죽어서야 이름을 알리는 예술가들의 생애와 업적은 다소 슬프게 느껴집니다. 이 세상에는 뛰어난 인재가 모두 성공할 수 없는 미스테리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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