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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을 실천한 위대한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

by 채리의 행복한 세상 2021. 4. 30.

‘진실은 목적이요 비폭력은 수단으로 생각한 인류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간디는 현재 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간디는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생각과 실천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인도의 서부에서도 사우라슈트라 주의 유명한 항구도신인 포르반다르의 명문가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부모로 부터 인도의 전통종교 중 하나인 자이나교의 교육을 받았으며 7세 때 아버지가 수상으로 부임하여 라지코트로 이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배움의 끈이 길지는 않았지만 간디의 말을 항상 믿어주고 독려해주는 분이었으며 어머니는 힌두교의 교리와 전통을 지키는 힌두교 신자였다고 합니다.

 

이런 가정환경은 간디에게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한 성격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요. 그는 청소년기에 방황을 하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상처를 치유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인도의 전통상 간디는 7세때 이미 약혼을 했지만 약혼녀들이 차례로 죽는 바람에 세번째 약혼녀인 상인 집안의 딸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13세때 결혼하게 됩니다. 이후 간디가 16세에 아버지가 사망하게 되면서 간디에게 큰 충격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임종당시 아내와의 성관계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이것 때문에 간디는 금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후 간디는 1887년 11월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여 바우나가르 주의 사말다스 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한학기를 보내고 방학중에 아버지의 친구였던 마브지 다베의 조언으로 영국 유학길을 떠나게 됩니다.

 

간디는 그해 9월말 영국 사우샘프턴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19세가 되던 1887년 영국의 보어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에 참전하기 위해서 자진입대하였으나 신체검사에 불합격하여 입대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1888년 런던에서 공부를 한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게 됩니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간디는 1893년 남아프리카로 떠나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게 됩니다. 남아프리카에서 그는 짐짝과 함께 내동댕이 쳐지는 일화가 있었으며 이로부터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는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정당하게 티켓을 구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등석에서 쫓겨났는데 당시의 1등석은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 처럼 좌석이 분리되어 있던 구조였다고 합니다. 이어서 간디를 쫓아낸 차장은 2등석과 3등석에 자리가 없으니 짐칸으로 가라는 모욕을 주었다고 합니다. 간디는 거부했지만 기차에 있던 직원들이 합세하여 그를 쫓아냈습니다. 기차에서 쫓겨난 간디는 하는수 없이 역마차를 탓으나 역마차에서도 영국인 마부가 그의 자리에서 담배를 피워야 겠으니 비켜달라고 요구하여 비켜주는 수모를 당합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후 남아프리카 정부에 반대하는 반정부 단체를 결성하여 반정부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남아프리카 정부의 자국민 보호를 위해 외국 이민자들의 신상을 기록하는 법률에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법률의 폐기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게릴라 시위를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당하게 되는데요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간디는 인도로 돌아오자 마자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제2차 보어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영국군에 자원입대를 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무사히 합격하여 영국군의 지휘를 받게 되지만 서류에는 계급이 없는 지원병 신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군생활을 하면서 간디와 인도인들은 의무병이나 후송등의 임무를 맡았고 가혹한 환경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하여 훈장을 수여 받기도 합니다. 이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대표자가 되어 각종조직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지만 현직 군인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요직에는 오르지 않았으며 인도인 차별에 반대하는 탄원서에 이름을 넣는 것 정도의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군 모병관으로 참전하게 되며 이후 영국군이 승리하게 되자 모병관으로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인정받아 영국 국왕으로부터 표창을 수여받게 됩니다. 하지만 간디는 영국인이 아닌 인도인이였기에 더이상 진급할 수 없었고 영국에서도 각종 차별대우를 받게 되자 결국 정치계에 입문하여 본격적인 인도 독립운동을 이끌게 됩니다. 간디는 ‘무저항 비폭력’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영국군의 해산명령이 있으며 거리낌없이 집회를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61세때에는 영국의 소금세 제정에 반대하는 소금행진을 벌였으며 인도 자치령과 파키스탄 자치령의 분리를 반대하였고 지속적인 통일을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리되고 말았으며 그는 이를 ‘정신적 비극’이라고 칭하였습니다. 간디는 인도가 분할되자 상심했고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과격 보수파 힌두교 신자들은 카스트 교리를 부정하고 무슬림을 인정한 것으로 보이는 간디를 적대시하게 되었으며 결국 1948년 1월 30일 79세의 나이로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라마’ 였다고 합니다. 그의 장례식 날에는 무려 2백만명이 넘는 조문객이 찾아왔다고 하는데요. 지금까지도 인도에서는 간디를 위인을 넘어선 신적인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단순한 예로 인도의 모든 지폐는 전부 간디의 초상이 새겨져 있으며 간디의 무상해 사상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전세계적으로 많습니다. 그는 불살생을 실천하기 위해 평생 채식을 했으며 진실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했으나 비폭력을 실천했습니다. 또한 해탈에 이르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으며 힌두교신자 였지만 다른 종교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교도이자 힌두교도이자 이슬람교도이자 유대인이다. 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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