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에서 새로 창간된 언론사의 공편자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독불연지라는 이름의 급진좌파 언론이었던 이 회사는 독일 사회주의자 아르놀트 루게가 독일과 프랑스의 급진주의자들을 합작시키고자 창간한 언론사 였습니다. 따라서 이 회사에 취업할 목적으로 마르크스 부부는 1843년 10월 파리로 이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루게 부부와 동거하였지만 1844년에 딸 예니가 태어나면서 루게의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독불연지’는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독일 쪽 기고가 들로만 가득차게 되었으며 결국 비독일계 기고가는 러시아에 망명온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는 지면에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한 사설’,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를 기고했으며 그 결과 독일계 연방국가들은 독불연지 발행을 금지시키고 수입된 부수들을 회수했습니다. 이러한 외압에 의해 독불연지의 창간호가 상당히 잘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루게는 다음호 발행을 거부하게 되었고 마르크스와 루게는 절교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 다시 혁명가들과 함께 <전진>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게 됩니다. 이 잡지에는 슐레지엔 지방 방직공들의 봉기를 기점으로 시작된 프로이센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지지하는 글들을 기고했는데요. 이 잡지는 부르주아 사상가들과도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활동은 프롤레타링의 권력 획득에 대한 필요성을 자신에게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잡지활동을 하면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 지면서 두사람은 정기적인 서신 교환과 만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마르크스는 수많은 철학자, 혁명가, 사상가들을 만났습니다. 피에르 조제프 루프동, 샤를 푸리에,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 미하일 바쿠닌 등의 사상에 대한 다양한 혁명적 사상가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가들과 만나면서 마르크스는 점차 자유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모하게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의인동맹’이라는 독일의 혁명적인 클럽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문학가들과도 만나면서 문학 혁명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이어 프랑스 혁명 당시의 지롱드파와 자코뱅파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비롯하여 고전학파 경제학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만든 ‘전지’이라는 잡지가 정부와 반동적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프로이센 정부도 마르크스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프로이센 대사는 마르크스가 만든 ‘전진’을 프로이센 국왕의 시해를 설파한다는 이유로 프랑스 정부에 정식으로 고발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마르크스는 추방대상으로 남아야 했으며 결국 마르크스는 가족과 함께 1845년 2월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비록 추방당했음에도 프랑스의 혁명가들과 교류는 계속되었으며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 전역의 혁명가와 진보적 인사들이 마르크스를 찾아와 주었습니다. 그는 1845년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집필하였으며 이책은 마르크스의 주요한 철학이 담겨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는 이해에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년만에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훗날 과학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 주의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기초를 닦은 결과물이었는데요. 집필이후에도 마르크스는 혁명운동을 위한 실천적인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브뤼셀 공산주의 연락 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명칭을 바꾸고 같은 해 독일의 망명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자 동맹의 도움으로 독일 노동자 협회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사상과 실천은 또 다른 혁명가나 사상가들과 충돌하게 됩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도 견해차이가 현저했으며 프루동이 1846년 ‘빈곤의 철학’을 쓰자 마르크스는 프루동 주의를 비판하고자 자신의 철학관을 담은 ‘철학의 빈곤’을 내놓았습니다. 마르크스는 독일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1848년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라인신문의 뒤를 잇는 ‘신라인신문’을 발행하였지만 1848년 혁명의 기운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차 꺼져 갔습니다. 1849년 5월에 들어서면서 독일 남부 지역의 여러도시에서 혁명세력의 봉기가 발생하게 되는데요. ‘신라인신문’은 혁명 세력을 응원하며 봉기를 진압하는 프로이센 당국의 야만적인 처사를 폭로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마르크스를 24시간내에 프로이센을 떠나라는 요구를 했으며 마르크스는 신라인신문 1849년 5월 마지막호를 발행하고 폐간되게 하였습니다.
폐간 이후 마르크스는 독일 남서부를 떠돌다가 파리로 돌아갔으며 이후 영국런던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는 영국 런던에서 살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게 되었고 자식 6명 중 3명이 죽는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런던 중심부에 있는 트라팔라 광장에서 34년간 거주 하며 지속적인 저술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이후로도 정치경제학 관련서적을 저술하였으며 1867년 <자본론>을 저술합니다. 또한 혁명운동과 인터내셔널 창립선언을 비롯한 주요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1870년대 이후 마르크스는 이렇다할만한 주요활동이 없었지만 대중적인 저술활동을 하면서 조용하게 살았고 1881년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병을 얻은후 알제리의 요양원에서 1883년 사망하게 됩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인간 해방의 위대한 투사 리스트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지금의 자본주의 자체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마르크스의 등장이후 자본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르크스 이전까지는 가난한 사람이 고통받는 이유가 그들이 게을러서 그런것이지 사회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마르크스 이후 빈부격차가 큰데에는 사회적인 책임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로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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