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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을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의 생애

by 채리의 행복한 세상 2021. 4. 28.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에서 살아 가고 있습니다. 과거 독일의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는 계급 간의 갈등과 투쟁에 의해서 역사가 발전해 나간다고 주장하였는데요. 이러한 그의 주장은 요즘시대에도 적용이 되는 내용임이 틀림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정립하여 상품의 가치는 노동량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고 가격은 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는데요. 이것이 잉여가치이며 이윤과 이자, 지대 등 많은 경제적인 관념을 정립한 인물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에서 부모인 하인리히 마르크스와 헨리에테 프레스부르크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출생은 프로이센 왕국의니더라인도 트리어시 브뤼켄 골목으로 알려집니다. 마르크스는 유대인의 혈통이었으며 외조부는 네덜란드의 랍비였고 친가는 대대로 트리어 랍비 집안이었습니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출생할 당시 친할아버지 역시 랍비였다고 합니다. 마르크스의 아버지 하인리히는 어릴적 집안 최초로 세속 교육을 맏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율사였으며 포도주 밭을 여러개 소유한 상류 중산 계급의 삶을 누린것으로 알려집니다. 마르크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라인란트 지역의 유대인 해방령이 폐지되었는데요. 그당시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유대교에서 프로이센 합동복음교회로 개종하고 이름고 독일식으로 하인리히로 개명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세속적인 계몽주의자 였으며 칸트, 볼테르와 같은 계몽철학자들의 사상이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절대군주제였던 프로이센 왕국에 헌법을 제정하고 개혁을 하자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녔는데요. 1815년 변호사로 개업했고 이후 카를 마르크스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마르크스의 어릴적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는 9남매 중 셋째였으며 형 모리츠가 1819년 요절하면서 장남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 집안에서 성인으로 무사히 자란 자녀들은 7남매 였으며 1824년 루터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마르크스는 집안에서 아버지에게 공부를 배웠으며 1830년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1836년 10월 17세의 나이였던 마르크스는 본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강요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8세 에는 심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 받았으며 이후 시인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1838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르크스는 법학에서 손을 떼고 철학에 완전하게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1839년 철학사 연구를 시작하여 박사 확위 논문을 준비했는데요. 비록 급진 헤겔 철학을 공부하였지만 정작 연구 대상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 였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예나 대학교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베를린 대학 졸업 후 대학에서 강연을 하려고 했지만 이내 좌절되었습니다. 그당시 대학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으로 헤겔 좌파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베를린대는 수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탄압의 영향이 상당히 강했다고 합니다. 베를린대학에 남아있던 마르크스의 스승인 학자 루노 바우어 교수는 헤겔의 제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해임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마르크스는 교수가 되려고 했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얌전한 학생이 아니었고 ‘청년헤겔주의자당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어 당연한 절차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842년 부터 자유주의 성향의 언론인 라인신문의 기고가로 일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독일의 정치에 대한 기사들을 썼으며 큰 반향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프로이센은 봉건주의적 형태가 많이 남아있는 과도기 였기 때문에 봉건주의와 자유주의와의 충돌이 잦았던 상황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혁명적, 민주주의적 색채를 분명하게 전달하였으며 사회의 현실과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다고 합니다. 그는 신문에서 검열과 정부당국의 탄압을 규탄하였으며 프로이센 내의 봉건체제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사회약자와 민중의 권익을 지지하는 활동도 펼쳤습니다. 예를 들어 여태까지 농노들에게 전통적으로 묵인해오던 나뭇가지 줍기를 금지하는 삼림도벌법을 통과시키자 그를 비판하는 기사를 싣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라인신문을 대형 신문사로 성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부의 탄압과 검열이 지속되었지만 마르크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라인신문이 일련의 사설에서 러시아를 신랄히 공격하는 기사가 나오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프로이센 대사에게 노여움을 표시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프로이센 정부는 라인신문을 1843년 폐간시키고 이어 마르크스는 실업자가 됩니다. 라인신문 폐간이후 그는 귀족집안 출신의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기로 하는데요. 예니의 집안에서 극심하게 반대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베를린대에 교수로 재직할 정도로 출신이 좋고 학구적 가풍까지 좋은 집안의 딸이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청년과 결혼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적인 마르크스의 풍모에 반한 예니가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1843년 6월 결혼을 강행하게 됩니다. 이러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이라는 원고를 틈틈히 썼으며 헤겔 사상에 대해 재고하며 그의 관념론적 사상을 비판하였습니다.  이후 마르크스는 혁명운동 준비를 하며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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