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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존재를 설명했던 르네 데카르트

by 채리의 행복한 세상 2021. 4. 27.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 명언은 데카르트의 이야기입니다. 어찌보면 당연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명확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항상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될 ‘가장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그의 생각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르네 데카르트는 1953년 3월 31일 투렌지방의 투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라에의 법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브르타뉴 지역 렌시의 시의원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데카르트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린 시절 몸이 무척 허약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데카르트는 1606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주에 입학하여 1614년 까지 8년에 걸쳐 중세식,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또한 라틴어와 수사학, 고전 작가 수업을 받았으며 3년간 변증론, 자연철학, 형이상학, 윤리학을 포괄하는 철학 수업을 받았다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학교를 졸업하고 푸아티에 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 자연, 과학, 법률학, 스콜라 철학 등을 배우고 수학만이 명증한 지식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1616년 리상스를 취득하여 실질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학교 밖으로 나갔으며 다시 제도권 교육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졸업후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네덜란드에 갔으며 30년 전쟁이 일어나면서 독일에 출정하였습니다. 데카르트는 1619년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첫 작품인 ‘음악개론’을 집필하였으며 같은 해에 독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여행하던 중 울름의 한 병영에서 자기 삶의 길을 밝혀 주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삶의 목표를 학문연구에 두기로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며 1621년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이후 5년간 여행하면서 순수 수학에 몰두하였습니다. 이때 함수의 원리를 처음으로 계발하였으며 1626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소일거리로 광학기구를 만들던 중에 1628년 당시 파리의 추기경이었던 피에르 드 베퀼과 만나게 됩니다.

 

추기경은 데카르트와의 대화에서 그의 명석함에 감동을 받아 진리탐구에만 전념할 것을 권유하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추기경의 조언을 받아들여 모든 간섭과 의무를 무시하고 다시 네덜란드로 떠나게 됩니다.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회로 부터 단죄받아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이 불태워졌다는 충격에 데카르트는 충격을 받았고 이후 과학을 버리고 철학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1635년 7월 19일 네덜란드에서 헬레나 얀스라는 전직 가정부에게서 외동딸 프랑신을 얻게 됩니다. 1640년 데카르트는 프랑신을 프랑스로 데리고 가서 교육을 받게 할것이라고 했지만 프랑신은 같은 해 9월 7일 성홍열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친구가 자신의 가족을 여의었을때 영혼 불멸에 대한 확인을 말해 주면서 슬픔을 참고 이길 것을 간곡한 편지로 써 보냈지만 그의 전기작가 였던 아드리앵 바예에 따르면 프랑신이 사망한 후 몇날 며칠을 서럽게 울었다고 합니다.

 

그는 1649년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황의 초청으로 스톡홀름에 머물며 여왕에게 자신의 철학을 강의하였는데 여왕은 새벽 5시 부터 강의를 시작할 것을 요구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과로에다가 스웨덴의 혹독한 겨울 날씨로 인해 폐렴까지 얻어 다음해인 1650년 앓아 눕게 되었는데요. 당시 데카르트의 친구이자 여왕의 시의 였던 뒤리에가 없어서 대신 뵐레스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의사가 데카르트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8일 후에 데카르트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데카르트는 살아생전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한 철학자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절 유럽대륙은 최후의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종교, 정파,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적인 진리만이 혼란으로 인한 사회와 역사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생각은 방법적 회의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그는 회의주의에 반대했으며 모든 조식은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으며 연역법으로 이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연역의 기반이 되는 제1공리를 얻어내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 유명 어록이기도 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기본 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게 됩니다. 후에 ‘성찰’에서는 ‘나는 있다, 존재한다’로 제 1명제를 치환했는데 자신의견해를 더 표현하는 쪽으로 나아갔음에도 사람들에게는 이전의 공식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제1명제로 기억에 남게됩니다. 데카르트는 어린시절 자신에게 사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신체적 결함을 가진 사람만 보면 왠지 더 친근감을 느끼고 이유없이 호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는 한때 사시인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에 빠진 데카르트는 소녀의 신체적인 결함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그녀의 신체적 결점을 압도하면서 사시라는 결점은 훗날 무의식적으로 좋은 감정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경험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은 선택의 순간에 맞닿았을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받은 감정적인 충격이나 상처때문에 종종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이 사소한 일화를 통해 감정이 어떻게 이성의 판단을 방해하는지 깨달았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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