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대문호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는 괴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시와 진실’, ‘색채론’,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등과 같은 많은 서적을 집필하여 지금까지 철학자이나 작가, 과학자로 칭송받고 있는 인물인데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으며 왕실고문관인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루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괴테는 어려서 부터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등 언어에 능했으며 그리스 로마의 고전문학과 성경을 즐겨읽었다고 합니다. 괴테는 아버지에게서 강인한 체력과 근면성실함, 어머니로 부터 예술적인 재능을 물려받았는데요. 어린 나이에 신년시를 써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선물할 정도로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1767년에 첫희곡인 ‘연인의 변덕’을 지었습니다. 1770년 괴테는 슈트라스부르크 대학 재학 당시 호메르스, 오시안,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에 눈을 떴으며 법률 사무소 견습일을 할때 약혼자 였던 샤를로테 부프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연애 감정을 옮긴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는 1775년 바이마르로 이주했으며 그 도시를 문화의 중심지로 이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행정가로서 국정에 참여하여 다양한 성과를 이루기도 하였고 식물학, 해부학, 지질학, 색채론 등 인간에 대한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1774년 앞서언급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하나로 유럽에 유명세를 떨쳤지만 그가 거의 60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 ‘파우스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만한 인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괴테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의 큰 돈을 벌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출판사가 그에게 인세를 조금 밖에 주지 않았고 유럽 곳곳에서 카피본이 돌아다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보고 감탄한 바이마르 공국 고위 귀족인 칼 폰 아우구스트 공작이 그를 초대하여 공무원으로 고용하여 3년동안 충분한 액수의 돈을 받았지만 이후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다는 핑계로 공무원 생활을 끝내기도 했습니다. 1775년 4월 괴테는 릴리 쇠네만과 약혼했지만 얼마후 파혼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괴테는 남국의 밝은 자연과 고미술을 접함으로 고귀한 내용을 완성된 형식으로 표현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하게 되는데요. 이때 저작물로는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 토르콰토 타소, 에그몬트> 등이 그의 과도기적인 작품입니다. 괴테는 1788년 무렵 독일에 복귀하여 그해 7월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와 동거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데요. 하지만 1789년 발발된 프랑스 혁명으로 괴테는 제 1차 대프랑스 전쟁에 종군하여 발미 전투와 마인츠 포위전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794년 자연과학 회의의 귀로에 종합적 직관적인 괴테와 이념적 분석적인 실러는 괴테의 식물변형론을 통해 상호 이해하였으며 1805년 실러의 별세때 까지 친교를 계속이어 갔다고 합니다. 괴테는 만 82살까지 장수했지만 아들과 아내 모두를 먼저 보냈기 때문에 늘 고독했다고 합니다. 괴테의 임종을 지킨 식구는 과부가 된 며느리인 옷틸리에 폰 괴테와 손자, 손녀 4명이었으며 괴테는 며느리에게 자신의 재산을 모두 물려주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살아있을때 명예와 부를 모두 누렸기 때문에 죽기전에 여러 유명인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며느리 손을 잡으며 이제 마음껏 살라는 말을 한뒤 ‘좀 더 빛을,,, 조금 더 빛을,,’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창문을 열어 달라고 한 의미로 전해지는데요.
괴테는 임종때 침대에 누워서 죽었다는 설과 의자에 앉아 사망했다는 이야기로 나누어 지기도 합니다. 그가 살아생전에 사용하던 펜이나 책상 등은 2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괴테는 아인슈타인이 존경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괴테가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는데요. 괴테는 살아생전에 베토벤과도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 두사람의 일화 중 하나로 산책을 하던중 맞은편에서 황족과 귀족 몇명이 걸어오자 베토벤은 저들에게 길을 비켜주지 말고 이대로 뚫고 지나가자고 말했으나 괴테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모자까지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에 베토벤은 괴테가 속물이고 비굴하다고 실망을 표현했고 괴테도 베토벤이 교양이 없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그뒤로 두사람은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괴테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기때문에 음악가들과도 교류가 많았으며 슈베르트에게 악보와 편지를 받았지만 음악은 시와 글보다 못하다면서 냉정하게 외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슈베르트가 사망한뒤 그를 인정했으며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또한 괴테는 도플갱어를 봤다는 기록을 남긴적이 있는데요. 환각일수 있지만 괴테는 혼자 말을 타고 사람이 없는 숲길에 도달하였는데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반대편에서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전했습니다. 이후 8년뒤에 꿈에서 봤던 길을 걷다가 자신과 닮은 사람이 입고 있던 재킷을 입고 가는 사람을 목격하고 신기해서 일기장에 적어두었다고 합니다. 괴테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는 인류의 우수한 지적재산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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