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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천년 제국의 기틀을 세한한 아우구스티누스 생애

by 채리의 행복한 세상 2021. 4. 23.


영국의 서양사 권위자인 피터 브라운이 쓴 저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천년 제국의 기틀을 세한 한 신학자의 전기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방탄한 청년기를 보내고 <신국론>,<고백론 등을 통해 그리스도 구원설을 절대적인 가치고 삼는 교부철학의 기틀을 세운 성인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는 354년 지금의 알제리에 해당 하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북아프리카 소도시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교도였지만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린시절 부터 아우구스티누스를 교육하였지만 어렸을때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향과 인근도시 마다우로스 혹은 마다우라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하려 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370년 집안의 형편이 풀리자 아버지는 16살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수사학을 배우게 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그곳에서 키케로의 글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철학에 심취하게 되는데요. 어머지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철학에 빠져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교리에 매력을 느끼며 마니교도로 14년 동안 살게 됩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 영지주의 종교 중 하나이며 현존하지 않는 고대 및 중세 종교입니다. 마니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마니의 다수 번역서와 단편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요. 이 우주론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에서는 선과 악, 영성과 물질성의 투쟁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선과 영성이 그 대립물인 악과 물질성을 극복하게 되며 이에 따라 빛이 물질 세계에서 점차 철수하게 되고 마침내 그 자신이 발출되어 나왔던 본디 원천인 빛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낳게 되는데요. 

 

그의 아들은 389년 어린 나이에 사망할때 가지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고 알려집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인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에 회의감을 느끼고 잠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가 마니교 동료의 추천으로 타가스테,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 등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후 우연한 계기로 성 암브로시오 주교를 만나게 되는데요.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의 첫인상에 큰 감명을 받고 그의 강론을 틈나는데로 공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강론 또한 그에게 진정한 진리를 얻게 하지 못하자 술을 즐겨 마시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어느날 진탕먹고 고민하던중 ‘집에서 읽어라’고 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아 아우구스티누스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그의 지인들과 함께 카시키아쿰의 별장에서 한동안 머물르게 되었는데요. 암브로시오 주교 밑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받으며 이듬해 387년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후 그리스도인이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들과 친구와 함게 고향이었던 아프리카로 돌아가려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모니카는 오스티아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이듬해 아프리카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수도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후에 수도회원들이 점차적으로 늘어났고 공동체는 수도생활을 넘어 일종의 성서 연구소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든 공동체는 13세기에 그가 정립한 회칙을 바탕으로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로 정식 발족됩니다. 396년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히포의 주교가 되었으며 이후부터 자신의 수사학 지식까지 총동원하여 히포의 백성들을 위해 사목 활동에 집중하였고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마니교인이었다는 사실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그의 발목을 잡았지만 399년 그의 3대 대작중 하니안 ‘삼위일체론’저술에 착수하였습니다.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단을 논박하거나 논쟁적인 상황을 동기로 쓰인 책인데요.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투자하여 426년에 완성하게 됩니다. 그는 죽기 3년전에 자신의 저서들을 다시 검토하는 <재론고>를 만들었으며 430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가 자신이 이룩한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빈다. 결국 8월 28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훗날 이탈리아 본토인 파비아와 밀라노로 옮겨져 성유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은 악의 문제에 대한 논증을 하였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존재를 받았다, 하느님은 지선하신 분이시다, 선에서 악이 나올수 없다, 따라서 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치열한 물질적인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돈 몇푼에 사람을 해치거나 사기를 치는 사건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 시기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는 것을 나타내는 데요. 그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도 큰 업적이 되었는데요. 아우구스티누스 성부 성자 성령을 관계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세 하느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분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고 하느님은 삼위일체인 한분이기 때문에 삼중의 존재로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상호의존적인 존재이며 아무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정의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나교에 몸을 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업적을 이루고 자신의 소명을 지켜나갔으며 그의 평생에 걸친 연구를 세상에 알린 큰 인물임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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